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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왜 성기를 '국부'라고 부를까? 그 이유는..

by 언니의 인생 꿀팁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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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시대 삼다수에더치커피

때는 1930년의 일본
아베 사다라는 여자가 있었음. 사다는 어린 시절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4살에 대학생에게 강간 당한 후 그 충격으로 방황하게 됨. 내가 더이상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이런 사실을 숨기고 시집가기도 싫고, 그렇다고 다 털어놓고 시집가기는 더욱 싫다. 더는 아무데도 시집 못 가는 몸이라 생각하니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 라고 함. 아니 피해자인데 왜....? 생각할 수 있겠지만 1930년대임. 여튼 사다는 1년여간 방황하며 집의 돈을 훔쳐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고 술을 마시는 생활을 반복함. 사다를 훈육하려고 애쓰던 아버지는 1년여간 공을 들여도 바뀌지 않는 딸엑 실망하고, 결국 딸을 포기하며 게이샤로 팔아버림. (이건 본인의 진술이고 사다의 언니는 사다가 자발적으로 게이샤가 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가려 들을 필요 있음.)
사다는 매춘의 늪에 빠짐. 게이샤 생활을 하다 빚을 감당 못해 매춘부가 되고, 점점 하급 유곽으로 옮겨감. 몇년간 매춘과 정상적인 일을 반복하던 사다는 1935년 다시 마음을 잡고 식당의 종업원으로 일하게 되는데,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남.
이시다 키치조임. 사실 사다에게는 오미야 고로라는 연인이 있었음. 고로는 고등학교 교장으로 사다가 원래 일하던 식당의 단골 손님이었는데, 돈벌이 때문에 자꾸 매춘으로 돌아가는 사다의 삶을 안타까워하며 그렇게 살지 말라고 충고하고 사다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했음. 요리점 견습생 생활을 하며 일을 잘 배우면 네가 독립할 경제적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작은 식당을 차려주겠다고 약속했고, 그걸 위해 자기 지인의 요리점에 견습생으로 취직 시킴. 키치조는 사다가 취직한 요리점의 주인이었음. 오미야 고로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사다 피셜 성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상대였음. 사다는 키치조에게 푹 빠졌고, 둘은 불륜을 시작함. (키치조는 유부남) 사다는 고로를 포함해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키치조를 만나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됐다고 함. <난생 처음 알게 된 사랑에 애태우게 되어 밤잠을 설치게 되었습니다> 라고,,,다만 키치조는 유부남이었고, 사다는 키치조의 아내를 질투하게 됨
1936년 5월 18일, 불륜을 시작한지 한 달이 좀 지난 시기였음. 사다는 키치조를 사랑했지만 위에서 말했듯 키치조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키치조가 가정을 버릴 리 없단 걸 알았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키치조와 헤어질 수 없을 거 같았음. 사다는 키치조와 동반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키치조가 순순히 자기와 함께 죽을 거 같지 않았음. 결국 사다는 기모노 끈으로 키치조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칼로 키치조의 몸에 자기 이름을 새긴 다음 그의 성기를 잘라 도주함.
다행히 언론은 난리가 남. 요새 일어났어도 충격적일 사건인데 자그마치 1936년임. 그냥 죽인 거면 치정살인이겠지만 성기를 자르고 그걸 가지고 사라졌는데 얼마나 충격이겠음.... 성기 자른 게 이 엽기 사건의 핵심이니까 보도를 하긴 해야겠는데 사람들 보는 신문에 떡하니 적자니 민망함. 아사히 신문사는 하복부를 베었다고 돌려서 보도했고, 요미우리 신문은 급소라고 표현함. 와중에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고민 끝에 <국부를 칼로 베었다> 라고 적음. 본래 국부의 사전적 의미는 "전체 중에 어느 한 부분을 이르는 말" 이지만 이 보도를 계기로 생식기를 지칭하는 표현이 됨.
이후 사다는 고로를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가명으로 여관에 투숙하다 범행 이틀 후 체포됨. 이때 유서와 함께 키치조의 성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유서 중 한 통은 키치조에게 쓴 편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당신. 죽어서 제 것이 되었습니다. 곧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라는 내용이라고 함. 조사 중에 왜 성기를 잘랐냐고 묻자 "그의 머리와 몸을 함께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라고 대답함. 그 외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이시다와의 장래를 생각하면, 이시다에게는 훌륭한 아내가 있어, 아무리 사랑해도 이대로는 한 달 중 보름 정도 밖에 만날 수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따르는데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차라리 죽이고 자기도 죽는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여 살해를 결심한것입니다. 이시다를 가장 사랑했던 것은 저인데, 장례식에 입회할 수 없는 것은 정말 유감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몸 일부를 잘라냈습니다. 저는 그를 너무 사랑했고, 그를 혼자만 알고 싶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부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살아있는 한 그는 다른 여자들을 안을 수 있었어요. 내가 그를 죽이면 다시는 다른 여자가 그를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를 죽였어요. 이런 진술을 함. 현대여도 눈 뒤집어 질 사건인데 1936년임. 아베 사다 사건은 당연히 일본 전국민의 관심을 받는 대 사건이 되고, 재판이 열림.
재판 과정에서 사다는 "사랑한 나머지 독점하고 싶어 그런 일을 저질렀지만 지금은 후회한다. 키치조의 극락왕생을 바란다" 고 진술함. 이후 재판장은 사다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함. 사건의 수위나 검찰의 구형에 비해 한참 낮은 판결이었는데, 범행 당시 사다가 심신미약이었다고 인정해서 그렇다구 함. 당시 신문 보도 내용은 이럼 (아베 사다는 오전) 10시 55분, 많은 수의 간수에게 지켜지면서 톡톡 터지는 플래시 속을 뚫고, 지하도로부터 출정한다. 왼손에 붕대를 감고 오른손에 손수건을 들고 피고석에 선다. 10시 57분, 호소야 재판장은 배석판사, 사카이 검사 등과 입정. 곧바로 개정을 선언하고 장중한 어조로 피고인에 대한 살인, 사체손괴죄를 선고한다며 주문을 뒤로 하고 30여 분간 장황하게 판결 이유를 낭독한 뒤 아베 사다에게 징역 6년(미결 통산 120일)을 선고하고 장래를 간곡히 훈계했다. 아베 사다는 검사의 구형 10년에 비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조용히 재판장을 올려다보았지만, 재판장은 '알겠느냐, 잘 알겠느냐'라고 타이르고, 7일간 공소할 수 있는 것을 전하자, 아베 사다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목소리를 떨며 '상소권을 포기합니다'라고 즉답한다. 재판장은 여전히 '그것으로 좋은가, 후회할 일 없을까'라고 물었고, 아베 사다는 분명히 '없습니다'라고 단언했다. 재판장은 서기에게 그 취지를 명하고, 또한 아베 사다에게 향해 '몸을 튼튼히 하고…….법원의 말을 잘 익혀서 성실하게 해야 한다구. 그리고 교도소를 나올 때는 영업적 치한이라는 바보같은 인간들이 있어 피고를 이용하려 하니까 그런 바보에게는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출소 후의 일까지 세세히 주의하자 아베 사다는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몸조심하고. 돌아가도 좋다' 아베 사다는 몇 번이나 정중하게 절을 하고, 또 다수의 간수들의 보호를 받아 11시 30분 퇴정했다.
이후 사다는 5년간 복역하다 건국 2600주년 사면 때 석방 됐고,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살았음. 자기 과거를 이해해주는 남자를 만났지만 그 남자 가족들의 반대로 헤어졌다구 함. 자서전도 내고, 인터뷰도 하고, 자기 사건을 주제로 한 연극에 본인 역으로 출연도 여러번 함. 그러던 중 1971년 관절염 치료를 받고 오겠다고 하곤 갑자기 홀연히 사라짐. 목격담은 들렸지만 확실한 행방은 알 수 없음. 다만 사다가 사라진 후 매년 이시다 키치조의 기일마다 발송인을 알 수 없는 꽃다발이 왔는데, 1986년을 마지막으로 끊겼다고 함. 그래서 1986년 5월 ~ 1987년 5월 사이에 사망한 거 같다구 추정함. 만약 이게 맞으면 81세까지 산 거임. 여튼 이 사건 보도를 계기로 국부라는 명칭이 성기를 점잖게 돌려 말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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